이순신 장군, 관노와의 이야기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흠결이 없어야 하는 위인중에 위인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때의 사실보다는 후대의 해석으로 평가받는 만큼, 아직도 관노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다르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노비 여진의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이순신이 품에 안은 여자. ‘여진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이 아파 울었다’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
난중일기 속 ‘여진’은 처음엔 번역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누구는 여자 노비로, 누구는 여진족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여진이 여자 노비라는 증거는 여전히 명확지 않다. 이순신, 그도 여자를 탐했을까?
인터넷엔 한때 ‘이순신이 동침한 여자’라는 주제의 글이 떠돌기도 했다. 대부분 난중일기 번역본의 일부 문장을 가감한 글이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596년 9월 14일.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1596년 9월 15일. 여진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이 아파 울었다.
1596년 9월 19일.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어떤 사람은 “이순신이 이렇게 난잡한 생활을 했나요?”라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이순신 장군도 관기나 종들과 ㅅㅅ(섹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이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의 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많다. 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조선시대엔 ‘종년을 간통하는 것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양반 주인의 힘이 막강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 어머니와 아내가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자식과 조카도 수시로 왕래했다. 군사와 백성들이 늘 리더 이순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이항복의 기록처럼 책임감으로 전쟁터에서 심신이 지극히 피로한 상태였다. 스스로도 젊었을 때부터 여색을 절제하려 했다. 그런 그가 함부로 다른 여인과 동침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