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차별적으로 자소서를 쓸수 있는 아이템 중 좋은 것이 바로 본인의 이름입니다. 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자소서를 쓰는데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습니다. 특히 광고/홍보 직군같은 창의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직종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아래 예문은 광고/홍보쪽을 지원/합격한 여학생의 자소서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글을 시작하며 인사담당자의 주위를 우선 끌어내고, 자신이 다녀온 여행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염두해야할 점을 여행의 경험과 연결하여 자소서를 풀어낸 케이스 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자소서에 쓸 사회경력이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억지로 학교생활이나 부족한 경험을 어색하게 강조하기 보다는 지원하는 지원자의 입장(신입)에서 마라톤이나 등산과 상대적으로 긴시간과 지구력을 요구하는 활동 등을 통해 미래 사회인이 되고자하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해야하는지 느끼고 얻은 교훈을 정리해보는 연습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내가 자소서에 쓸 경험이 없다면 이번주라도 당장 집에서 가장 가까운 5km마라톤이라도 신청(증명서나 메달 주는 코스)해보고 설령 그 5km를 뛰지못하고 걷더라도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렵다면 설악산, 지리산, 치악산 등 정상등반도 좋습니다.)

합격자들의 자소서를 살펴보면 여러분이 준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읽었을때 부드럽게 읽히냐 아니면 뻑뻑하게 읽히냐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꼭 작성하고 소리내어 읽어보시고 탈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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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 XX 광고기획 
 
  저를 이끌어가는 삶의 모토는 ‘삶은 유희고, 유희는 삶이어야 한다’입니다. 즉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사랑을 하고,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등 삶의 일상적 행위들을 하나의 ‘유희’ 활동으로 즐길 수 있다면 인생을 더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밝음이 넉넉하다’라는 뜻의 유희(裕熹)라는 이름 덕분인지 이러한 저의 가치관은 삶의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임하고, 쉽게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와 유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에는 책, 직업, 사람, 운동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겠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광고’라는 매체를 통해 브랜드나 상품의 홍보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의 의미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2007년 스웨덴에서 1년간 교환학생을 하며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문화를 공유하고 타인과의 차이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방학 2개월 반 동안 유럽 14개국을 쉬지 않고 떠돌아다녔던 여행입니다. 8개월 동안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함께 아시아대륙을 횡단해 유럽까지, 여행객의 발이 잘 닿지 않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이 저와 달리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며 살아가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 혼자 여행을 다닐 때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았고, 체력이 떨어졌거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속에서도 당당히 침착하게 대응하는 여유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즉 나라는 울타리에 갇힌 고정관념을 버림과 동시에 남과 다른 나라는 존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번의 광고를 보며 삽니다. 광고는 제품홍보의 기능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화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매력적이고 필수적인 활동입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컴에 지원하는 지금, 그리고 되고 나서도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저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들과 광고를 향한 소신을 절대 잃지 않겠습니다.

이력서들을 보다보면 최근의 트렌드에 또 정형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컨텐츠보다는 내가 누군지에 대해 최근 유행하는 양식, 형태, 단어들을 선택하여 작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소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건 지원하는 회사에서 왜 여러분을 뽑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되어야 합니다. 아래의 신문사 취업/합격 자소서에 먼저 한 번 읽어보시고 다시 읽어보면서 자기은 지원하는 회사에 어떤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자소서는 지원동기에 과감하게 지원하는 회사의 단점을 기재하고 그 단점을 본인의 지원동기와 잘 엮어 풀어낸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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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일보 기자 - 지원동기 
 
  어려서부터 눈에 안경을 달고 살았다. 천성이 내성적이라 방구석에서 책 읽고 텔레비전만 본 탓이었다. 남들과 대화하는 법도 잘 몰랐다. 밥상머리에서 부모와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부모 역시 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내내 방에 박혀 있는 모습을 보면 걱정할 법도 했는데, 오히려 밖에서 사고 치지 않는 점을 반가워했다.
 
  고향을 떠나 대학에 들어갔다. 그제야 안경 너머로 사람이 보였다. 시간만 나면 동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담배 연기는 어찌나 달콤하던지. 한번 사람 냄새를 맡기 시작한 뒤로는 거칠 게 없었다.
 
  과외 자리를 마다하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술집, 노래방, 당구장,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일부러 생소한 만남에 빠져들었다. 책 종류는 일부러 멀리했다. 또 다른 편식 탓에 학점은 바닥을 기었다.
 
  처음 거머쥔 자유에도 슬슬 염증이 생길 즈음 소집 영장이 나왔다. 대학교 2학년을 끝마칠 무렵이었다. 부친이 국가유공자여서, 자식에게는 6개월 공익근무 혜택이 주어졌다. 그게 싫다면 현역 복무도 가능했다.
 
  손에 들린 카드 두 장을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남이 받지 않는 특혜’라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처진 어깨를 두드리며 아버지가 말을 건넸다.
 
  “이건 특혜가 아니야. 불법이 아니니까 남들에게 피해줄 일도 없다. 다만 나중에 네가 그만큼 나라에 갚으면 되는 거야. 알겠지?”
 
  우체국에서 공익 근무를 마치고 대학에 돌아오니 자연스레 고학번이 돼 있었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고향에 있는 부모는 당연히 고시 준비를 할 줄로 믿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학원비가 통장에 입금됐다. 두 분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었다. 아들놈은 그 돈을 갖고 한겨레문화센터를 찾았다. 기자라는 직업이 궁금해서였다.
 
  하루아침에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공익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해, 1년이 넘는 방황이 시작됐다. 간판은 고시생을 달고 있었지만 실상은 늘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큐레이터, 출판기획자, 문학평론가… 도서관에 서식하며 이런저런 직업소개 서적을 찾아 읽었다.
 
  ‘한번 사는 인생, 내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알고 죽으려면 뭘 해야 할까.’
 
  그러던 와중에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라는 책을 접했다. 평소 이름을 알고 있던 젊은 언론인의 글이었다.
 
  한겨레문화센터 기자 강의를 수료하고, 그해 가을부터 학보사 생활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였다. 딱 1년만 일할 심산이었는데 2년을 채워버렸다. 인간관계를 떠나서 일 자체가 적성에 맞았다.
 
  얼토당토않게 사회부 대신 문화부에 배치됐지만, 부서 배치는 그리 큰 문제가 못됐다.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과정은 늘 새롭고 가슴 떨리는 작업이었다. 20년 넘게 살아왔고 대학생활만 4년 이상 했지만, 이때만큼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편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자가 되는 수밖에 없겠구나.’
 
  어찌 보면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됐다. 더 이상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굳이 XX일보에 인턴 원서를 낸 이유는, 공고가 제일 먼저 뜨기도 했거니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회사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마침 촛불시위에 편승해 안티 XX운동이 극단적으로 치닫던 무렵이었다. 면접을 보던 날에도 코리아나 호텔 앞에는 채 치우지 못한 쓰레기가 널려있었다.
 
  운 좋게 인턴에 합격하고, 시청 팀에 배치됐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6주 교통비만 15만원이 넘어갔다. 때로는 직접 기사를 발굴하고 때로는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맡았다. 노트북에 카메라까지 들쳐 메고 다니다 보니 디스크까지 걸렸지만 간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다시 샘솟았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지친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내가 느낀 XX일보는, 역시나 보수적인 신문이었다. 중대한 나랏일에 대해서 꼿꼿이 자기 할 말을 하는 걸 보니 줏대와 자존심만큼은 국내 제일인 듯했다. 처음에는 ‘1등 신문’이라는 홍보가 무척 눈과 귀에 거슬렸는데, 겪어보니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신문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시청 기자실에 배치된 온갖 일간지 중에 XX일보 기사의 양질과 편집 실력을 따라갈 만한 신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위 선배들을 보고 있자면, ‘이런 기자가 300명 넘게 있는데 신문이 잘 안 나올 리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제 그 선배들과 정식으로 함께 일하고자 한다. 비록 가진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자의 눈을 밝혀줄 정론지를 만들어가고 싶다.
 
  자존심과 실력은 인정하지만, XX일보에는 아직까지 ‘진정성을 알리는 능력’이 부족하다. 10대부터 90대 모두를 아우르려면 매사에 강경 일변도로 나가서는 곤란하다. 사회 전체를 설득할 만한 아량과 진정성. 나는 그것을 XX일보에 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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